00
“박 대표님께서 오늘 좀 보자십니다. 이번에 미얀마 건 관련해서 하실 말씀 있으시다고.”
박성호의 세탁기. 명재현의 돈통. 석계미술관 이상혁 관장을 그렇게 불렀다. 누구나 그렇게 부르진 못하고 아는 사람들만 수군댔다. 이상혁 없는 데에서만. 한때 리우라는 가명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한때였다. 그렇게 부르던 사람들은 이미 저 세상에 가고 없었다.
태산은 상혁을 꼬박 관장님이라고 불렀다. 관장님, 우리 관장님.
하. 까탈스럽고 탐미적인 우리 이 관장님.
문 앞에서 뒷짐 지고 서 있던 태산이 정장 소매를 살짝 걷었다. 시계가 3시 23분을 가리켰다. 태산이 마주하고 있는 관장실 통유리 벽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때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슬슬 나가야 했다. 시간 엄수 확실하신 관장님께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관장실 거울 앞에서 이미 15분째였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상혁의 철학이었다. 눈썹을 덮을 만큼 길어진 앞머리를 왁스로 한 올 한 올 만졌다. 미용실 예약해드린대도 극구 싫댔다. 미용사가 내 머리 만지는 거 싫어. 그럼 계속 기르실 거예요? 아니. 언젠간 가셔야 되잖아요. 귀찮아, 나중에. 유난스러우신 상사 뒀는데 뭐 어째. 태산은 방바닥 무늬나 셌다.
석계미술관 관장실은 좀 잡스러웠다. 적어도 태산 눈에는 그랬다. 미술관은 3층을 통으로 관장실로 썼다. 어떻게 봐도 미술 전시랑은 상관이 없는 게지. 유리벽에는 빗방울이 변칙적으로 맺히고 있었다. 애초에 관장실인데 사무실 책상보다 그 옆에 전신 거울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사무실 책상도 네모 반듯하질 않았다. 타원도 아니고 비정형의 노란색 책상. 인테리어 문외한인 태산 눈엔 좀 유난스러웠는데 상혁은 그 책상을 들여 놓고는 한참을 흡족스러워 했다. 책상 위의 조명도 뉴욕의 어떤 디자이너의 것이라며 상혁이 두고 두고 예뻐라 했다. 태산 눈엔 그냥 돈지랄이었다. 정작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별다르게 놓인 게 없었다.
상혁의 관장실은 사무 공간이라기보다는 17세기 유럽 귀족의 콜렉션 진열실이었다. 양쪽 벽면을 꽉 채운 진열장에는 상패나 기념패들이 몇 개 오와 열을 맞춰 있었다. 그나마 패션 잡지나 디자이너 콜렉션북을 가끔 태산이 교체해 주는 것이 책의 전부였다. 진열장에 놓인 잡동사니 중엔 타지마할 모형이 가장 눈에 띄었다. 가장 싸구려 같아서였다.
저 타지마할 모형 말이에요. 기다리던 태산이 지겨워 입을 열었다. 허업. 말하기 전 숨을 먹는 건 태산의 오랜 습관이다.
타지마할 가보셨습니까? 어딨는지 아세요? 인도에 있거든요. 왜 째려보세요, 모르시잖아요, 잘. 모르셨죠. 에이, 모르셨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장례식도 하고 화장도 하고 씻기도 하고 한대요. 저 인도 영화도 진짜 재밌게 봤었는데. 발리우드 영화 졸라 웃겨요. 아니, 그래서 원래 물어보려던 거는, 스읍, 관장님은 남 뼛가루 흘러다니는 물로 씻을 수 있다, 없다? 저 대답 좀 해주시죠. 그럼 1억 주면 그 물 마실 수 있다, 없다? 아, 잠깐만, 관장님 눈 한번 감았다 뜨는 걸로 몇천 억이 왔다갔다 하는데 제가 뭔 개소릴.
“한태산.”
“…넵.”
“너 내가 작품 볼 때 말 걸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관장님 그냥 20분째 거울 보셨잖아요…. 그런 소리 했다가는 정강이부터 걷어차일 미래가 선명하므로 입을 다물었다.
상혁이 사무실 책상 위의 향수를 집어 들었다. 위스키 같아 보이는 패키지의 향수였다. 귀 뒤에 한 번, 손목에 한 번 뿌리고는 마침내 문 쪽을 향해 걸어 왔다. 스모키한 향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다리와 아찔하게 맞물렸다.
문을 열려던 태산의 몸이 상혁에 의해 돌아 섰다. 상혁의 시선이 태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 붙었다. 태산이 눈치껏 얼굴을 내밀었다. 형님 친히 매만지시라고. 당신 맘대로 머리도 정리하시고, 얼굴 꼬라지도 살피시라고. 상혁이 흡족스럽게 태산의 뺨을 쥐었다. 이리저리 둘러 보느라 태산의 고개가 양쪽으로 돌았다. 그리고는 제게 키를 맞추느라 구겨진 소매와 옷 끄트머리 잡아 당겼다. 다시 곧게 선 태산의 넥타이도 한 번 다시 고쳐 맸다. 상혁의 작품이었다.
“잘 빠졌네.”
예쁜 거 좋아하시는 이 관장님, 또 한태산 기럭지 싫어하실 수가 없지. 상혁이 위아래로 태산을 감상하며 흡족스럽게 허리를 감싸 쥐었다. 옆구리에 와닿는 상혁의 손가락 끝에 의도가 다분했다. 이제서야 저를 올려다 보는 상혁의 얼굴이 보인다. 높이는 착각을 불러 온다. 위에서 아래로 조금만 누르면 제가 이길 것 같다. 길게 빠진 눈매가 사람을 맑아 보이게 한다. 검은 돈에 먼 눈이 맑아 보인다니. 태산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침 삼키는 소리가 상혁의 귀에까지 들렸다. 상혁의 입꼬리가 꿈틀댔다. 아, 입술…. 립밤을 바르셨나. 내가 관장님 립밤을 챙겼던가.
“가자.”
상혁이 나 몰라라 씽긋 웃고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저렇게 웃는 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3년째 상혁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지만. 때 없이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남의 돈 빨아주느라 손에 구정물 잔뜩 묻히고 산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부조리였다.
입구를 나서자 미술관 앞 정원에서 덩치 하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경비로 세워 둔 놈이었다. 그를 발견한 상혁의 걸음이 빨라졌다. 마른 다리 휘적이며 다가가 덩치 앞에 섰다. 7, 8미터쯤 가까워지고서야 덩치가 상혁의 존재를 눈치 챘다. 그제야 덩치는 담배를 급히 비벼 끄고는 꽁초를 주웠다. 그의 손 안에 담뱃재가 바스라졌다.
상혁이 일언반구 없이 앞을 주시했다. 시야에 덩치의 턱이 걸리는 높이였다. 니가 알아서 고개 쳐숙이란 소리였다. 덩치는 군말없이 제 몸을 낮췄다.
빡.
뒷통수 후리는 소리가 시원했다.
“미술관, 내, 금연, 이라고, 했냐, 안 했냐.”
어절이 끊어질 때마다 귓방망이 갈기는 소리가 둔탁해졌다.
“하지 말란 건 하지마, 알겠어?”
“예, 형님!”
“씨발…. 야.”
“죄, 죄송합니다, 관장님!”
“그래, 간다.”
“다녀오십시오!”
상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실은 화난 적도 없었다. 기강 한 번씩 잡아줘야 직성이 풀렸다.
태산이 먼저 정원을 가로질렀다. 대문 앞에 세워 둔 BMW 530의 뒷문을 열고 기다렸다. 느긋하게 따라 온 상혁이 몸을 실었다. 문을 닫아 준 태산이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시동을 걸고 룸미러를 올려다보니 상혁은 벌써 뒷좌석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관장님, 청운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3년이면 알아서 할 때 됐다. 가는 길 내내 태산은 룸미러로 상혁을 살폈다. 도둑놈처럼.
야위었다. 성질머리를 그렇게 쓰니까 그러지. 예민해서 살도 도망가는 걸 거다. 잠도 잘 못 자고. 업어가도 모르겠다. 이대로 들고 튈까. 쪼꼬만 게. 상혁에게 들키면 목부터 날아갈 생각들이었다.
“태산아.”
이거 봐, 지금도 깊게 잠 못 들지.
“예.”
“성호 일 마치면 화양동으로 간다.”
상혁은 그의 손발을 태산이라 불렀다.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