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차 뒷자리에서 상혁이 잠투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하고 신음하더니 입을 뻐끔이는 게 백 미러 너머로 보였다. 희미하게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얼굴이 잠깐이지만 푹 잔 모양새였다. 태산은 종종 이런 순간에 상혁이 제 형님인 것을 잊곤 했다. 제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서 몸을 구기고 자는 상혁은 좀처럼 그 나이같아 보이지 않았다. 작은 체구 탓이 컸다. 태산이 속삭였다.
“방금 서울 들어왔습니다.”
학여울역을 지나 남부순환로를 따라 양재역 방면으로 가다 보면 한 블록이 통째로 청운 타워였다. 미술관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들어 와 이제 막 강일IC를 지났으니 온 만큼 더 가면 될 터였다.
도곡동에 청운 타워가 들어선 건 순전히 박성호의 의지였다. 소공동에 있던 청운 인터내셔널 사옥을 옮겨 온 건 6.25 전쟁보다 오래 된 청운 그룹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박성호는 청운 인터내셔널 대표 이사 선임과 동시에 사옥 이전을 추진했다.
청운의 창립자이신 제 증조부께서는 언제나 새 땅에서 새 시대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이건 선언 아닌 선포였다. 자. 이제부터 박성호가 새 시대를 연다. 누구의 뜻도 아닌 창립자 박재흠의 뜻을 따라. 애초에 이름부터 정통 자처하는 박재흠의 증손주다웠다. 재흠의 좌우명을 본받아 성호의 부모님은 일찍이 제 자식의 이름에 이룰 성, 맑을 호를 써, 성호라고 지었다.
뜻이 돌처럼 단단하라 하여 지여석(志如石), 마음이 맑은 물과 같으라 하여 심여수(心如水)라 했다. 지여석 심여수. 청운 그룹 창립자 박재흠의 좌우명이었다. 박재흠은 1945년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땅에서 시멘트 장사를 했다. 그게 청운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청운의 손이 닿지 않는 사업이 없었다. 도로를 내고, 다리를 놓고, 아파트를 올렸다. 정부와 손 잡고, 유혈은 눈 감고, 비명은 귀 막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이었다. 이 남한 땅에 더는 지을 게 마땅치 않아 비좁게 느껴질 무렵 청운 그룹은 라면에서 미사일까지, 이쑤시개에서 인공위성까지 사람들의 생활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2026년 현재, 청운.
자산 총액 179조 982억 원, 재계 순위 5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굴지의 대기업으로 이름을 날리다.
청운이 벌어들인 돈으로 짓고 세운 금자탑의 이름 앞엔 ‘석계’ 두 글자가 붙었다. 당신의 좌우명을 따라 돌 석과 시내 계를 합한 박재흠의 호였다. 석계 아트홀, 석계 회관, 석계 문학상, 석계 복지재단, 석계 꿈드림 장학금, 석계 미술관 ……. 그렇게 경제는 청운이, 사회 공헌은 석계가 도맡았다. 그럴싸한 재벌가의 자아 분열이었다.
청운의 이미지는 늘 위태로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가 조작이라느니, 정경 유착이라느니, 경영권 분쟁이라느니, 불미스러운 사건에 언급되는 날이, 되지 않는 날보다 많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꼭 석계를 들먹였다. 석계 재단에서 좋은 일 많이 하잖아. 국가 교육과 문화 예술 복지에 이바지하잖아. 과연 석계의 존재 의의였다.
사람들 말만 모아 놓으면 나쁜 짓은 청운이 하고, 착한 짓은 석계가 했다. 실상은 반대였다.
석계가 하는 일을 청운이 모르게 하라.
청운가의 불문율이었다. 물론 그 불문율이 지켜진 적은 없었다. 당연히 석계 미술관의 돈이 석계 재단의 돈이었다. 그 돈이 석계 재단 이사장 박성호의 주머니로 들어갈 거라는 건 모두가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석계에서 구린내가 난다는 심증은 넘쳐 났다. 그래도 물증을 확보하려는 간 부은 인간은 없었다. 있다 해도 최소한 박성호 눈에 띄지는 않아야 했다.
태산이 3년 전 처음 청운 타워를 방문할 적, VIP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혁은 이전의 정보들은 전부 까먹어도 상관 없으니 딱 한 가지만 지키라고 일렀다. 신신당부하는 내용과는 달리 어린 애 어르는 말투였다.
‘박성호한테 말 걸지 마.’
‘아, 관장님, 그 정도 눈치는 있죠.’
‘있죠?’
‘…있습니다. 형님, 저 좀 믿어주세요. 저 그 정도로 눈치 없지 않습니다.’
‘살랑살랑 눈치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한 번 깝쳐 볼까 알짱거리지 말란 소리야.’
넌 박성호한테도 깝칠 것 같애. 상혁이 덧붙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다 형님들하고 잘 지내보려는 저의 노력이죠, 저 신입이잖습니까. 아직 조직 생활이 낯설다는 변명이라도 하려 했으나 그 말마저 상혁의 다음 말에 가로 막혔다. 상혁은 태산을 돌아 보지도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너 성호가 어떻게 저 자리에 올랐는지 알아?’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5년 전, 나이 서른에 일찍이 청운 인터내셔널 대표 이사 자리를 차지한 박성호의 등장이 적법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절차야 적법했겠지. 그러나 절차를 적법하게 만드는 건 권력이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위치를 재배치하고 의지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권력.
‘뭐, 뻔하죠. 피 좀 보고, 돈 좀 쓰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건 누구나 하는 거고.’
‘누구나 피 보고 살진 않아요.’
‘그래, 따바악 따박 말대꾸 해, 모가지 날아가고 싶으면.’
‘죄송합니다.’
태산의 장점이 있다면 까부는 만큼 사과가 빠르다는 거였다. 더 지랄도 못하게.
층수를 알려주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가 15를 넘기고 있었다. 태산은 무언가 더 말할 듯 말해주지 않는 상혁에 좀이 쑤셨다. 이게 다 제 밑에서 일 막 배우기 시작한 놈을 길들이려는 상혁의 심산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태산은 일보다 꼼수가 더 빨리 늘었다. 빠른 사죄 후 할 수 있는 건 눈알 굴리는 것뿐이다. 이건 조직 생활하기 전부터 익힌 꼼수였다.
계기판의 숫자가 21을 넘기기 직전이었다.
‘성호는 바보야.’
‘예?”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바보야. 바보만큼 무서운 게 없는데…….’
너 왜 바보가 바보인지 알아? 밥밖에 몰라서 바보야. 성호가 그래. 늘어 놓는 말들이 건조했다.
하나밖에 몰라. 다른 건 눈에 안 들어 와. 마음을 먹고, 하겠다고 결심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 그 바보. 모든 게 제 뜻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려. 뜻대로 안 되어도 상관 없어. 될 때까지 하니까. 그외엔 다 무시해도 되는 거야. 지도에 목적지 핀 꽂으면, 신호등이고, 가로수고, 길 건너는 사람이고 모조리 무시하고 직선으로 내달리는 금수 새끼라고, 성호. 그니까 우리 성호가 어떻게 저 자리까지 갔냐면….
‘박성호가…. 마음을 먹었어. 그게 다야.’
상혁은 이럴 때마저 성호를 다정히도 불렀다. 뭐가 안쓰럽기라도 한 양. 걱정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게 이상했다. 박성호가 자기 돈줄이며 목숨줄이며 쥐고 흔들고 있는 사람 아냐? 자기가 박성호 발 밑으로 기어야 하는 입장 아니냐고. 그런 사람을 짠하게 여기는 상혁이 단단히 정신 나가 보였다.
누가 누굴 가여워하나.
안타깝게도 박성호에 정신 팔린 건 이상혁이지, 한태산이 아니다. 태산은 이딴 서울 복판에 건물을 세운 박성호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요즘 트렌드 경기도에 회사 차리기 아닌가? 네이버고 삼성전자고 하이닉스고 다 서울 바깥에 회사 차린 거 아니었어? 어차피 속으로 따질 거 아무 소리나 막했다. 박성호 미친 거 아냐? 이 시간에 서울 강남으로 사람을 불러? 앙? 실제로 딴지 걸 것도 아닌 일에 딴지 걸게 만드는 교통 상황이었다. 오후 5시에 다다를 무렵 서울의 도로는 좆 같기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대통령 급 국빈이 아닌 이상 교통 체증은 모두에게 공평하기까지 했다. 관장님 모시고 청운 가는 VIP 차량이라도 양보 없었다는 소리다. 운전대 잡은 한태산만 관장님 눈치를 봤다.
그래도 벌써 창 너머로 높게 솟은 청운 타워의 유리창 벽면이 보였다.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상혁의 눈빛이 또렷해지는 게 뒷통수 너머로 느껴졌다.
“저것 좀 어떻게 안 되나.”
청운 타워가 들어 선 블록 모퉁이에는 황금색 돼지들이 두발로 서서 정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문화예술진흥법을 따라 타워 앞에 정체 모를 거대 조형물을 설치했어야 했댔다. 근데 왜 돼지에요? 묻는 태산에게 상혁은 신경질을 냈었다. 몰라, 묻지 마, 짜증나. 나중에 성호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지만, 돈이랑 복 들어 오라고 돼지 동상을 갖다 놓은 거라고 했다. 와, 박 사장님 졸라 단순해. 태산이 아양 떨자, 성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격은 별로 안 단순해. 얼만데요? 27억. 헤엑.
박성호 저딴 데 27억 쓸 거면 나 주지, 그냥. 상혁은 청운 타워를 드나들 때마다 번쩍거리는 돼지 세 마리를 욕했다. 팔다리가 너무 짧뚱하다느니, 주름이 너무 리얼하게 층층이 접혀 있어서 징그럽다느니, 과하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 명재현네 가게 단골들 떠올리게 한다느니, 황금색으로 떡칠을 해 놓은 게 촌스럽다느니, 앙리 마티스 짭 같다느니, 27억짜리 무생물에 다는 악플 수준이 사이버 렉카 저리 가라였다. 어후, 난 진짜 못 생긴 게 존나게 싫어. 상혁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성호. 별 말 없었어?”
“그냥 미얀마 건 때문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미얀마…. 재현이 쪽에선 별 말 없었는데.”
지금으로부터 29일 뒤 미얀마에서 대형 거래가 있을 예정이었다. 품목은 신종 액상 마약. 전자 담배와 분간이 어려워 최근 수요가 급속도로 늘고 있는 종이었다. 기존에 해오던 거래와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미얀마 건의 규모는 비교적 컸다. 박성호의 돈 30억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전에 풀던 돈의 세 배 가까운 금액. 이 정도 돈이면 1년 동안 한 150억까지는 만들 수 있지 않나? 박성호는 까딱하면 사형인 양의 불법 마약 내다 팔라면서 명재현을 골렸다. 펀드 매니저한테도 안 칠 장난이었다. 그래도 재현은 너스레를 떨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난과 너스레로 이어진 대화가 모조리 진담이라 등골이 서늘했다. 박성호가 명재현한테 30억을 준다. 명재현이 30억을 150억으로 만들어 온다. 그럼 이상혁이 여기저기 떼어 주고 깨끗하게 빤 돈을 석계 금고에 채워 넣어야 했다. 언젠간 박성호가 청운 그룹 총수가 될 길에 쓰일 비자금이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박성호 돈으로 사오고, 명재현이 내다 팔고, 이상혁이 그림을 만들 예정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거기에 차질이 생길 게 뭐가 있지. 느낌이 구렸다.
석계미술관 이상혁 관장님 오셨습니다.
비서가 무전으로 상혁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27층 성호의 집무실까지 가는 길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 탄 것처럼 매끄러웠다. 상혁을 가로 막는 사람도 없었고 몰라 보는 이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상혁이 성호를 쏘아 붙일 게 뻔했다. 박성호 성격에 성가시기 싫으니 일찍이 교육해 놓은 게 분명했다. 성호의 집무실에 들어 가기 전 두 사람을 맞는 여자 비서가 태산의 얼굴을 보자마자 귀를 살짝 붉히는 것 빼면 달라진 것도 없었다. 태산은 눈치 채지 못해도 상혁은 알 수 있을 정도의 미묘한 변화였다.
비서가 상혁과 태산을 앞질러 사장실 문을 열었다. 그는 상혁과 태산이 사장실에 몸을 다 들이고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90도로 숙인 허리를 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호는 정장 차림으로 직접 대리석 바닥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앞치마 두르고 장갑까지 꼈다. 끼고 있는 헤드폰은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지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밀대는 이미 마이크 스탠드가 된 지 오래였다. 성호가 헤드폰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노래를 열창했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청운 인터내셔널 창고 세일하나요? 아니요, 그냥 진짜로 미쳤다고요. 태산은 이런 실 없는 농담이나 떠올렸다.
박 사장님 무대 매너도 죽여 줬다. 소절이 끝날 때마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자세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푸른 언덕에—. 밀대 막대기를 반대로 착. 베낭을 메고오—. 다시 반대로 싹. 황금빛 태양, 축제를 여느은—. 이번엔 뒤를 돌았다. 성호와 눈을 마주친 상혁이 어색하게 박수를 쳤다. 이상한 리듬이었다. 성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상혁이 안녕? 태산이도 잘 지냈어?”
두 사람을 발견한 성호가 끼고 있던 헤드폰과 앞치마, 장갑을 벗으며 응접용 쇼파에 앉았다. 다소곳이 앉은 무릎 위로 앞치마도 개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는 걸 몰랐을 수 있나. 저 밑에서부터 보고 받지 않았던가. 성호의 기묘함은 맥락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비롯됐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고 차분할 수 없을 때조차 정직한 자세를 취했다. 박성호 이상하다. 뭘 모를 땐 진실로 모르는 사람 같았고, 이해할 수 없게 차분할 땐 진실로 차분해 보였다. 진정성도 과하면 거짓말 같았다.
고개를 가볍게 털어 앞머리를 넘기는 성호의 모습이 고급스러운 사무실 풍경과 잘 어울렸다. 저 새초롬하니 이쁘장한 얼굴로 사람 여럿 담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아니면 사람들 다 미인계에 넘어간 걸지도 모른다. 구미호에 홀리듯이.
얇고 선명한 선을 그리는 이목구비, 그중에서도 날카롭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가 성호 인상의 8할을 결정했다. 집안에서 연예인 되는 걸 반대해서 청운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다 그 미모에서 출발한 거였다. 솔직히 이건 한태산도 인정한다. 길 가다 보면 감탄만 나올 얼굴이다. 청운이 브랜드 광고를 위한 모델을 따로 쓸 필요가 있냐는 말이 왜 나왔는지 매번 납득하게 되는 와꾸였다. 석고를 유려하게 깎은 듯한 턱선과 콧대를 보고 있으면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게 신기했다. 저 얼굴이 조각이 아니라는 거지?
“왜 그러고 서 있어. 와서 앉아.”
성호를 만나러 오면 늘 있는 일이었다. 성호는 상혁이 저를 편하게 여겼으면 하고, 상혁은 끝까지 성호에게 예의를 지켰다. 상혁은 박성호가 앉으라 할 때까지 앉지 않고, 가라고 하기 전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점이 상혁을 향한 성호의 애착을 더욱 구질해지도록 만들었다. 야아, 친구끼리 왜 그래. 그러면 상혁은 선을 긋는 대신 선을 옮겼다. 에이, 친구여도 사장님이신데 어떻게 그럽니까. 성호는 상혁의 그 점을 제일 마음에 들어 했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상냥한 말씨였다. 상하이 잘 다녀 왔어? 이번에도 어김 없이 세심한 질문이었다.
“뭐, 똑같지. 아, 근데 무슨 일이 있었냐면.”
상하이에서 샤오룽바오를 시켰거든? 근데 첫 번째 만두를 집어 들자마자 숟가락에 구멍이 난 거야. 아니아니, 아, 나 뭐래. 숟가락이 아니라 만두에. 육즙이 다 흘러나와서 옷에 다 튀었잖아. 성호가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웃었다. 상혁은 성호를 따라 웃으며 태연하게 물을 마셨다.
“아, 그리고 상하이가 생각보다 춥더라. 바람이 진짜 많이 불어. 서울보다 남쪽이잖아. 근데 왜 그렇게 추운 거야?”
“바람 부니까 춥지.”
성호가 또 웃었다. 상혁은 입꼬리에 잔뜩 힘을 준 채 잔을 내려놓았다.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던 태산은 괜히 제 귓구멍을 한 번 후벼보고 싶어졌다. 성호는 말이 많기만 하면 다행인데 대화의 흐름마저 산만했다. 이번엔 대뜸 상혁에게 MBTI를 물었다.
“갑자기?”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나? H-O-M-E 려나.”
성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게 무슨 MBTI야!”
“집돌이 유형.”
“아, 진짜. 너는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성호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상혁은 그제야 조금 진심으로 웃었다. 태산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뭐하자는 거지. 하나같이 네이버 지식인에서 가져왔을 법한 대화 주제들이었다. 정작 대화를 이어 나가는 성호도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게 보였다. 이야기가 끊길라치면 서둘러 다른 질문을 꺼냈고, 상혁이 한마디 받아치면 그걸로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저러나. 태산의 직감이 쎄했다.
“태산이는? 별일 없지?”
“쓸데없는 얘기 안 해도 돼, 성호야.”
듣다 못한 상혁이 정색하고 결국 흐름을 끊었다.
“어, 야…. 진짜 고맙다. 나 사실 힘들었어. 정말 너밖에 없다, 상혁아. 요새 직원들이 나더러 스몰 토크 같은 거 너무 못한다고 해서 연습하는 중이었거든. 나중에 밥 먹으면서 더 얘기하자.”
지금까지 되게 자세하셨는데. 태산은 상혁과 일하며 따따부따 말을 참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가끔은 그냥 안 참고 정강이 걷어 차이고 말았다.
“본론부터 말할게.”
“응, 이제 좀 너답다.”
“칭찬이지?”
“응. 당연하지.”
그래, 본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성호의 안광이 바로 건조해졌다. 과장 좀 보태어 살기가 스쳤다. 기척이 시리다. 마침내 좀 박성호다웠다. 지금이나 실없는 소리 늘어 놓지, 상속 순위에서 한참 밀리는 주제에 아직 살아 있는 늙은이들을 죄다 젖히고 청운 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자리를 꿰찬 사람이다. 게다가 성호는 청운가의 금고, 석계 재단 앞에서 보초까지 서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동안 장부가 조금씩 빠그라졌었잖아.”
“……그래?”
“모르고 있었어? 난 너도 대강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몰랐는데.”
“매 건당 조금씩 빠져 나간 게 그동안 다 합쳐서 한 80억쯤 되던데.”
상혁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태산은 청운 타워의 못 생긴 황금 돼지들을 떠올렸다. 27억짜리 돼지들. 촌스럽고 못생긴 돼지 우리를 만드는 데에 27억도 쓰는데, 80억이면 박성호한텐 돈도 아니지 않나. 상혁도 태산과 같은 생각인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굳은 얼굴 근육과는 딴판인 목소리였다.
“80억이면 별로 큰 돈도 아닌데.”
성호가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아니지.
“금액이 사소한 거지, 횡령이 사소한 건 아니지.”
제대로 명중이었다. 자신이 쏴야 할 표적이 무엇인지 잘 아는, 박성호의 솜씨였다.
너 성호가 어떻게 저 자리에 올랐는지 알아? 오래 된 음성이 태산의 귀에 맴돌았다.
성호는 제 아버지가 죽고 상속 받은 지분을 기반 삼아 청운 인터내셔널 대표 이사 자리에 올랐다. 벌써 5년 전 얘기다. 친부의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운에 피바람이 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직 박성호의 나이가 서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이 앳되고 새침해 보이는 얼굴을 경계하지 않았다. 기어 오르려면 아직이지. 늙은이들의 오산이었다.
상속 절차가 이루어지고 얼마 안 가서였다. 당시 청운 인터내셔널 대표였던 성호의 백부 박환길이 횡령 및 배임 혐의로 형사 입건되었다. 그에 따른 경영 공백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주주총회가 소집되었고, 이사진이 대거 교체되었다.
보나마나 박성호의 작업이었다.
아무도 말 안 해도 모두가 그렇게 알았다. 새로 구성된 이사회는 경영 정상화를 명분으로 박환길을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했다. 한바탕 칼춤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그제야 박성호의 속 모를 시선,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겠는 그 검은 눈동자를 모두가 주목했다.
때는 이미 늦었다. 박환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큰돈을 빼돌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중요한 건 그 죄를 누가 묻느냐다. 그리고 성호는 그걸 잘 알았다. 누구를 겨눌 것인지 정하고 나면 그다음은 절차의 몫이었다. 하나같이 적법한 수순이었다. 칼자루는 남에게 쥐어주고, 칼날이 지나갈 자리를 미리 정해둘 것.
박성호의 명중에는 빗나간 흔적이 없다.
태산은 다시 성호를 보았다. 80억. 그 돈을 누가 가져갔는지 아직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성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환길을 겨누었을 때도 저랬겠지. 자기는 정말 모른다는 말간 표정으로 상대가 자기를 향한 총구를 알아보기도 전에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을 것이다.
상혁을 겨누나.
“리우.”
성호가 상혁의 옛 시절을 소환했다. 상혁이 성호를 돌아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 주인의 처지를 깨닫게 만들기에 너무 간편하다. 부르는 것만으로 내가 누구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래, 상혁은 그의 손발을 태산이라고 불렀다. 태산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전부 자길 설명하는 일에 구속된다. 호명은 권력이다.
시종일관 상혁이라 부르던 일을 중단한 건 일종의 편집점이다.
지금까지 했던 대화는 여기서 끝. 이제부터 새로운 장면이야. 그게 성호의 메시지다.
성호가 상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호의 팔이 상혁의 어깨에 둘러졌다. 지저분한 의도는 읽히지 않는데 오히려 그래서 경계됐다. 태산의 눈엔 상혁의 어깨 위를 툭툭 치는 성호의 손가락만 보였다. 성호의 입술이 댓발 튀어 나왔다. 답지 않게 어리광이었다.
“누가 내 지갑에 빵꾸를 뚫었을까? 아니지, 어떻게 뚫었을까?”
물놀이를 갔다가 장난감을 잃어버리고 투정하는 어린 애 같았다. 진정 속상한 표정이었다.
“태산이는 알아?”
“예?”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불똥이 쇼파 뒤에 서 있던 태산에게로 튀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이 문장에 ‘감히’ 두 글자가 생략되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호가 쇼파에서 일어나 사무 책상에 걸터 앉았다. 책상에 있던 액자를 집어 들었다. 성호가 빤히 들여다 보는 사진이 무엇인지 태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성호로부터 벗어 난 상혁이 겨우 몸의 긴장을 푸는 모습이 보였다. 성호의 질문이 얼음장 같던 공기를 갈랐다.
“재현이가 관리를 잘못했나?”
“…글쎄. 나도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은데.”
“근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그러게…….”
상혁이 에둘러 빙긋 웃었다. 성호는 뭔가 석연치 않은 눈치였다. ‘그러게’ 같은 건 성호가 바라던 답이 아니다. 그건 태산이 생각해도 적당한 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혁이 할 만한 답도 아니었다. 평소의 상혁이라면 말도 안 된다며 당장이라도 배신자 조질 계산이 끝났어야 하는데.
역시 명재현 이름을 들먹여서겠지. 태산도 가늠하는 걸 성호가 모를 리 없다.
“상혁아, 지금 나만 답답해? 그거 우리 집 돈이잖아.”
성호가 액자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우리 집. 성호는 상혁과 재현을 묶어 세 사람을 줄곧 우리 집이라고 불렀다. 상혁과 재현이 그렇게 말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태산이 아는 한 그랬다.
성호가 액자를 내려 놓았다. 프레임과 책상끼리 맞부딪히는 딱 소리가 듣기 싫게 났다. 액자가 엎어져 전과 달리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
“오케이, 나 마음 먹었어.”
“…….”
“상혁이가 이번엔 장부 잘 맞춰 오는 걸로.”
“…….”
“관장님이 찾아와요. 나랑, 너랑, 재현이 돈. 빼돌린 놈도 같이 찾읍시다.”
세 사람이 정녕 한 집 식구라면, 이건 가정 붕괴의 신호탄이다. 마음 먹은 건 박성혼데 움직이는 건 이상혁이다. 피 보는 건 누구지. 따지고 보면 가정 붕괴도 아니었다. 원래 가족이란 게 그런 거였다. 누군가는 식구를 먹여 살리고, 누군가는 식구를 빨아 먹게 되어 있었다.
성호가 책상에서 내려왔다. 손가락으로 상판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 미얀마 건 있잖아.”
“응.”
“그거 네가 직접 봐. 재현이한테만 맡겨두지 말고.”
돈이 어디서 새는지 보라는 거야. 들어오는 돈이랑 나가는 돈이 안 맞으면 중간에 누가 가져간다는 소리잖아. 이번에는 어디서부터 안 맞기 시작하는지 확인해. 내가 이번에 30억을 그냥 내준 게 아니거든. 이상하지 않아? 장부에서 돈이 그렇게 없어졌는데도 내가 또 돈을 줬다는 게. 가만히 듣고 있던 상혁의 낯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무슨 뜻이야?”
“돈 가져가는 놈이 있으면 또 가져가겠지. 여태 안 걸렸으니까. 이번에도 안 걸릴 줄 알고.”
“…….”
“그러니까 이번에는 누가 손대는지 봐. 재현이한테 물어보고, 거래처에도 확인하고. 돈이 나간 다음에 장부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보고. 장부만 맞춰오지 말고, 누가 맞췄는지도 알아 와.”
“…….”
“30억이면 미끼로 충분하지 않아?”
상혁만 뚫어져라 보던 태산이 성호를 힐끔 쳐다 보았다. 80억이 사라진 사람의 얼굴처럼은 안 보였다. 80억을 잃고, 다시 30억을 내놓는다라. 돈을 되찾겠다는 건지, 돈을 가져간 사람을 잡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을 잡는 김에 다른 것까지 알아내겠다는 건지.
“너 왜 대답이 없어요?”
“…응. 알아 볼게.”
“좋다. 할 수 있지?”
“안 돼도 되게 할 거면서.”
“역시 상혁이. 깔끔해서 좋아.”
성호가 개운한 얼굴로 책상에서 몸을 뗐다. 진짜 개운한 건지는 차치하고, 아무튼 이야기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상혁도 그제야 소파에서 일어섰다. 성호는 돌아서서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가봐도 돼.”
태산이 먼저 움직였다. 상혁보다 앞서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상혁이 문턱을 넘으려는데 등 뒤에서 성호가 불렀다.
“상혁아.”
상혁은 돌아 보지 않았다.
“재현이한테 안부도 전해 줘.”
원래 안부라는 게, 숨 붙어 있을 때 많이 주고받아놔야 되거든. 성호의 진심 어린 우려가 문 뒤로 흩어졌다.
주차장을 오는 내내 상혁은 손가락을 튕겨댔다. 규칙적이지도, 그렇다고 무질서하지도 않은 박자로 손을 쥐락펴락했다. 태산은 상혁과 반 년쯤 지내고서야 이게 상혁이 초조할 때 나오는 습관임을 알았다. 걸음이 평소보다 빠른 걸 보아 마음이 급한 게 확실했다.
태산의 머릿속도 덩달아 복잡했다.
박성호가 먼저 명재현의 이름을 꺼냈다. 상혁은 모른다는 말만 두 번 했다. 이상혁이 저렇게까지 모를 사람인가. 최소한 한태산이 알기론 아니었다. 명재현이 돈을 빼돌렸다면 상혁은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아니, 둘이 같이 한 짓이라면? 그렇다면 박성호는 왜 명재현이 아니라 이상혁을 불렀지. 명재현은 이미 다녀갔나. 아니면 아직 부르지 않았나….
태산은 박성호가 어쩌면 이미 범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도달했다. 알고 있으면서 상혁에게 찾으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 이건 수사가 아니지. 시험이지. 누구를 잡아 올 것인지, 누구를 감쌀 것인지. 상혁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보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태산의 추론 중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혁이 차에 올라 타자마자 입을 열었다.
“좀 찾아 봐.”
“명 마담이요?”
“야.”
“네.”
“명재현인 거 확실해?”
“아닙니다. 자금 어디로 새나갔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태산은 룸미러로 뒷자리를 살폈다. 상혁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튕기던 것도 멈췄다. 대신 엄지로 검지의 마디를 문지르고 있었다. 중간에 걸리는 반지를 매만지면서. 룸미러 속 상혁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뭐해? 시동 안 걸고.”
“화양동… 가십니까.”
이 상황에서조차 가겠냐는 소리였다. 당장이라도 명재현 등에 박성호가 준 칼을 꽂아야 할지 모르는데, 기어코 볼 거냐고. 아니면 박성호가 널 의심한다고 알려줄 건가. 어느 쪽이든 상혁이 불리해질 것 같았다.
태산은 차라리 상혁이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으면 했다. 미술관이든 집이든. 어디든 명재현이 없는 곳으로. 정신머리 올곧게 박힌 사람이면 그래야 했다.
“엉. 재현이 보러 갈래.”
그래…. 가겠다고 작정했으니 가시겠지. 이상혁 정신 나간 지 오래고, 한태산에겐 선택권이 없다. 태산은 시동 버튼을 눌렀다.
화양동엔 명재현이 운영하는 룸싸롱이 있다. 이름하야 룸 무굴. 무굴 제국의 무굴? 자기가 샤 자한이라는 거야? 처음 술집 이름을 듣고 태산은 명재현 자의식 수준 미쳤네, 하고 기함했었다.
관장님 모셔다 드리기 가장 싫은 곳을 꼽으라 하면 명 마담 가게였다. 거기 가봤자 좋은 꼴 못 봤다. 하룻밤에 어지간한 월급쟁이들 한 달 월급 태우는 미친 놈들은 어디든 쎄고 쎘다. 방 잡고 암수 정답게 떼로 씹 뜨는 꼬라지도 불법은 아니었다. 약쟁이들 약 빨고 VIP랍시고 비싼 방마다 널브러져 있는 건 한심한 인생들이라고 혀 끌끌 차면 그만이었다.
태산은 그냥 씹 뜨는 걸로 안부 인사 나누는 재현과 상혁의 방식이 비위 상했다.
“명 마담이요.”
“…….”
“왜 같이 안 사세요.”
침묵. 선 넘지 말라고 쿠사리 먹을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말이 없다. 차라리 좀 혼을 내시지. 저한테 꼬라지라도 부리고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시지. 그런 속셈이었는데 통하지 않았다. 룸미러로 본 상혁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창밖의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주차장 밖을 나서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은 이미 깜깜하고,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자동으로 연결된 차량의 음악 플레이어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흘러 나왔다. 태산은 음악 볼륨을 높였다. 뒷자리의 상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호흡이 일정해져가는 게 들렸다. 태산은 상혁의 숨소리 하나하나에 자신이 안심하는지도 모르고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차가 사무 단지들을 겨우 빠져 나갔다. 빽빽히 건물이 들어선 서울의 풍경이 징그러웠다. 겨우 빌딩 숲 속을 벗어나나 싶었는데 여름철 해운대 피서객처럼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남 주긴 싫고 지가 갖긴 아까운가 보지.”
피아노 소리에 상혁의 목소리가 파묻혔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라 더 그랬다. 그래도 태산 귀엔 기어코 닿았다. 상혁의 숨소리도 들리는데 말소리라고 안 들릴 리 없었다.
“보통 반대 아니에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남 주긴 싫고 지… 자기가 갖긴 아까운가 보다고요.”
“제대로 말했는데?”
“…관장님이요, 아님, 명 마담이?”
좋아하면 연애하고, 꼴리면 떡 치는 단순한 인생의 한태산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명재현, 이상혁. 아니, 실은 박성호까지 모조리. 처음 상혁과 한 침대에 누웠던 날, 태산은 기어코 물었다. 대체 무슨 사이십니까. 상혁은 가족 같은 사이라고 했다. 가족도 아니고 가족 같은 거.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가족도 아니고 가족 같은 사이인데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도 아니고 빠구리부터 뜬다고요?
상혁이 등을 돌려 누우며 읊조렸다.
한태산. 이 난장에서 니가 알던 세상 찾지 마.
영동대로를 건너는 차가 빼곡했다. 태산의 속도 그렇게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누굴 가여워 하나. 누가 누구를.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룸미러 속 상혁은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태산의 이가 아득 갈렸다. 맵싸한 기운이 명치 끝에서부터 치밀었다. 태양은 벌써 다 넘어 가고 한강 서쪽 끝의 붉은 빛만이 하루의 증거를 남겼다. 한강물이 시꺼맸다. 해가 진다. 명재현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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